박해정
너는 아마도 긴 시간을 기다렸을 게다.
어느 순간이 너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
유용한 가치가 되기 위해 너는
꾹 참고 기다렸을 게다.
수줍음도 아니요, 고독도 아니다.
그냥 많은 다른 종이들처럼 인쇄기에 끼인 채
가만히 쓰일 날을 기다렸던 게다.
하지만, 어느 순간 너는
인쇄기의 잉크가 아닌
둔탁하고 멋없어 보이는 연필의 끝 앞에
몸을 누인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.
기나긴 외로움은 그쳤지만
또 언제 한 장의 구겨진 몸뚱아리로
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져질지
촛불의 뜨거운 몸짓을 지나 허공으로 사라질지.
그렇지만 난 믿는다.
너의 몸뚱이에 쓰인 조각조각으로
사람을 눈물로, 불끈 쥔 주먹으로
다시 서게 해줄 또 하나의 순간을 너는 기다리리라. . .
1993. 11. 9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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